날마다 새로운 그림



뜬금없고 지금 중요하지도 않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오로지흘러가는잡담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897891038

아, 참으로 애증의 책이고, 애증의 번역이다.
번역한 지도, 출간된 지도 오래된 책을 짚고 넘어가고 싶어진 것은 원문을 구해 보게 만들 만큼 애증이 생겨서다.
로맨스 시대물인데, 특히 대화 중간중간의 작가의 서술이 짤막짤막하고 약간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편이라면 더더욱 번역하는 건 힘들 것 같다. 그런 어려움을 감안하면 사실 이 책의 번역은 잘된 부분, 혹은 원작의 건조함을 재미있는 한글 표현으로 한껏 상쇄시킨 부분도 꽤 된다. 난 이런 대범한 번역을 선호한다. 번역가에게 이런 면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문제가 심각해서 그 심각성의 정도를 미안하게도 이런 곳에 공개해놓고 싶어진 것은 내용 자체를 틀리게 한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냥 영어 '단어'나 '구'의 뜻을 몰라서(라고 보인다) 뜬금없는 번역을 하고 그래서 그것과 이어지는 단락이 또 말이 안 되니까 원뜻과 비슷하지만 다른 뜻으로 뭉개서 번역해놓은 부분이 너무 많다.
그냥 몇 부분만 보자. 사소한 것까지 다 잡으면 끔찍하게 길어질 것 같고 애정 소설이라 공개된 곳에 못 쓸 부분도 있고 그렇다. 그래서 몇 부분만 공개하고자 한다. 이 오래된 책을 잡고 이런다고 날 너무 박하고 나쁜 놈이라 생각하지 말아 달라. 애증이라니까.

Betray + emotion 번역
초반에 표현이 3개 나오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싶어서 대체 원문에 무슨 단어를 썼는지 궁금해지게 만든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이상하게 느껴졌던 세 부분 모두 한 단어 betray를 잘못 번역한 것이었다.

1. 3장. 특별한 동굴 중에서
Gideon's voice was husky now, betraying some new emotion that Harriet could not identify.
이 책의 번역:

바른 의미:
기던의 목소리는 이제 해리엇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감정을 드러내며 쉬어있었다.

2. 4장. 왈츠 중에서 - 여긴 뜬금없이 제대로 되어 있음. 부정어 little 덕분인 듯.
Effie had handled the situation with admirable poise, however. She had betrayed very little of her flustered condition.
이 책의 번역:

바른 의미:
하지만 에피는 감탄할만큼 침착하게 그 상황에 잘 대처했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도 거의 내비치지 않았다.

3. 6장. 운명의 바퀴 중에서
"You must trust me," Gideon said in a dark, husky voice that betrayed his desire as surely as his body did.
이 책의 번역:

바른 의미:
기던이 그의 몸이 지금 그런 것처럼 분명히 자신의 욕망을 노출하는 어둡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번역이 나온 원인을 생각해봤는데.. 그냥 이 번역가가 betray 뒤에 감정이 나오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표시/노출한다는 뜻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


단락 전체를 왕창 틀리게 번역한 경우
한 마디로, 읽을 때 뜬금없이 대체 뭔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어서, 절대 이게 아닐 거라는 촉이 와서, 결국 원문을 찾게 만드는 데 제일 크게 기여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
7장. 가라앉은 폭풍 시작 부분
The gossip about the rumored challenge between Gideon and Morland was almost overwhelmed by the gossip about what soon came to be known throughout the ton as the Quarrel. All of Society, much to Harriet's disgust, appeared to be fascinated by her refusal to talk to her husband. Word spread like wildfire that evening at the ball. The Bride of the Beast of Blackthorne Hall was giving her lord the cold shoulder.
Speculation was rife concerning the cause of the Quarrel. Ultimately Harriet's reasons for refusing to talk to her husband were far less interesting to Society than the fact that the Quarrel itself was proving such delightful entertainment.
이 책의 번역:


바른 의미:
‘언쟁’이라는 이름으로 사교계 전체가 알게 된 한담거리가 풍문으로 떠돌던 기던과 몰랜드의 결투에 대한 소문을 압도해버렸다.
사교계 전체가 해리엇이 남편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 같았고 해리엇은 그 점에 진절머리가 났다. 무도회가 있던 밤에는 온갖 말이 들불처럼 번졌다. ‘블랙손 홀의 짐승’의 신부가 남편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이고 있대.(있다고.)
‘언쟁’의 원인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근본적으로 사교계 사람들에게는 남편에게 말하길 거부하는 해리엇의 이유보다야 즐거운 오락거리인 ‘언쟁’이라는 한담거리 그 자체가 더 흥미로운 주제였던 것이다.
추가 설명:
the Quarrel이라고 quarrel 첫 알파벳을 대문자로 해놓아서 뭔가 특별히 다른 의미가 있다고, 혹은 결투를 뜻하는 다른 단어라고 착각이라도 한 모양인데, 아무리 그렇다해도 어떻게 저런 번역이 나올 수가 있나? A가 B에 overwhelmed되었다는데 B는 어디로 가버리고 결투(A)만 살린 저런 번역이 나오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그냥 생각을 하기 귀찮았거나 자작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작을 그렇게 해놓으니 뒤이은 단락도 '해리엇이 남편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라는 말로 자연스럽게 얼렁뚱땅 이어놓았다. '도'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이 앞단락의 부연, 연장 상황을 서술한 단락일 뿐이다.
또한, 연이어 나오는 세 번째 실수로, 그 사실 'quarrel 때문에 이번 싸움(결투)에 관한 추측이 난무'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quarrel(부부싸움. 사교계 사람들이 벌써 이름까지 붙여서 한담거리 삼았기 때문에 작가가 강조하느라고 the Q를 쓴 것으로 보임.)에 관한 추측이고, 원문을 보면 의문의 여지가 없듯이 사교계 사람들은 해리엇이 남편에게 말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해리엇에게는 말을 하지 않게 된 '원인/이유'가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그 상황 자체를 가십으로 더 즐기고 있다는 뜻이다.

동작을 바꿔버린 경우 + 행위자를 바꿔버려서 남자주인공을 쉣~하게 만들어버린 경우
문제는 두 가지인데 한 단락에 나오는 경우인지라...
Harriet gave a muffled shriek of surprise when Gideon's massive hands closed around her waist from behind. He picked her up and carried her effortlessly out onto the floor amid a flood of stifled giggles and disapproving gasps.

이 책의 번역:

바른 의미:
오류 1. 기던은 해리엇을 '들어서 운반'했다. 일으켜 세워서 데려간 게 아니라. 뒤에 연이어 에피가 이 상황을 두고 나무라는 장면이 나오는 부분까지 이걸 다 날려버리고 있다.
오류 2. 킬킬거린 건 기던이 아니라, 그 상황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다.


기타 수없이 틀린 번역 - 단어 뜻을 모르고 그냥 막 한 듯.
11장. 구출의 시작 부분은 맥락은 통하지만 단어나 구를 잘못 번역해서 곳곳에 틀린 번역이 난무한다.

overzealous
번역: "해리엇이 '화석과 유물 연구 학회'의 질투심에 사로잡힌 어떤 회원들에게 납치된 것 같아요."
수정: “전 해리엇 언니가 ‘화석과 유물 학회’의 어떤 지나치게 열성적인 회원에게 납치당했다고 생각해요.”

dine in
"I intend to dine in tonight," he murmured by way of explanation.
번역: "오늘 밤 저녁식사나 함께 할까 생각중이었습니다." 미끼를 던지듯 낮은 음성으로 말을 꺼낸...
수정: “오늘 밤에는 집에서 식사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이유를 대듯이 중얼거린 후...
할 말이 없다... dine in 이라잖나. 앞서 에피가 한 말에 변명하듯이 대답한 건데 미끼를 던지듯이라니...;

"There is no use pretending or trying to put a polite face on it."
이것도 펠리시티가 격에 맞지 않게 무례한 발언을 하는 것처럼 번역해놓았고,

I got the barest hint of it last night at the Wraxham soiree.
아직 그 일이 완전히 퍼졌다는 정도까지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 소문의 아주 기본적인 낌새가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냥 앞에 한 말과 이어지지 않게 '(내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어요' 식으로 번역 해놓았고,

Harriet would never break a commitment of that nature.
해리엇은 그런 성질의 약속을 깨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뜬금없이 '자연의 위임' 운운. (다른 부분 보면 of that nature를 그런 성질이라고 멀쩡히 번역한 부분도 있다. 화석 얘기하는 부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히려 거기선 자연 운운했어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눈치 못 챘을걸?)

"It would be one thing if we actually thought Harriet would marry Applegate," Felicity explained pragmatically.
"그래서 우린 실제로 해리엇이 애플게이트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란다....;; 여기 어디에 '해야 한다' 그런 뜻이..?
we thought에 너무 집중한 듯 한데, 앞부분하고 연결이 안 된다는 걸 생각했어야 하지 않나? 의미는 해리엇이 진짜로 애플게이트와 결혼하면 '앞 단락에서 말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라는 뜻이다. 해당 부분만 썼지만 앞단락 연결해서 보면 이 번역은 진짜 말이 안 된다.

"As you wish, sir. Never say I did not warn you."
음울하고 건방지고 특이하다는 느낌을 풍기는 등장인물인 기던의 집사 아울이 한 말이다. 이 번역을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했는데 왜 상황 곳곳에서 나오는 아울의 건방짐을 무시하고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난 날씨 나쁠 거라고 너한테 경고했다, 내가 안 알려줬다고는 하지 말라는 뜻인데.

하드캐슬 저택의 저녁 식사 장면에도 한 개 작지 않은 오류가 있고, 음...솔직히 말해서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미 단어 자체를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까지 앞에서 지적했으니 더 일일히 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지치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대체 무슨 얘기냐?!했던 부분.
"What if by some chance he is alive? Do you think he will accuse me of attempted murder?"
"I think," Gideon said gently, "that the very last thing Morland will do is to accuse you of murder." He will be too busy trying to save his own hide, Gideon promised himself silently.




몰랜드는 자기가 한 나쁜 짓 때문에 자기 목숨 구하기 바빠서 널 고소 못한다고 생각하며, 그놈이 최후에나 할 짓이 널 고소하는 거라고 위로를 하고 있는데, '날 살인 미수로 고소할까'라며 걱정하는 부인한테 '아냐! (살인 미수가 아니라) 살인죄로 널 고소할 거야!'라고 한 방 먹이는 멋진 캐릭터가 되어 버림...;;;; save one's own hide라는 표현도 몰랐던 듯.


아.. 책 속에서 언급된 해리엇이 보는 책이름도 그렇고 단어 뜻이 틀린 부분은 참으로 많다... 뜻이 원래와 달라진 부분은 곳곳에 많으나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독서 재미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는 게 신기한 점. 그래서 결국 애증으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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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실 이런 외국 장르 로맨스 소설 본 지 얼마되지 않았다. 원래는 할리퀸의 60주년 기념으로 풀린 공짜 이북(원서)을 먼저 봤는데 보다 보니 워낙 웃기고 의외로 찡한 부분도 있고 해서 근래까지 나온 지 오래 되어서 국내에 이북으로 풀린 것들만 사 봤다.
그런데 보다 보니, 그 주로 할리퀸을 번역한 출판사에서 낸 책들의 상태가 무척 안 좋더라. 그냥 기본적으로 한글 문법이 많이 틀려있었다. 띄어쓰기가 잘못 되었거나 문장이 비문인 경우가 종종 있고, 맞춤법이 틀린 것은 아주아주아주 대박 많더라.
심지어 얼마 전에 산 (이것도 출간된 지는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북 하나는 '내'와 '네'를 구분하지 않고 막 써서 내용 자체가 엉망이 되었고, 글자가 자/모음으로 분해되어 있더라. 이걸 돈 내고 사서 본 사람이 있다면 분해된 한글을 본 기분이 어땠을까...
그래서 좀 의심이 든다. 워낙 떼로 많이 내는 곳이라서 기본적인 교정을 제대로 안 보는 것 아닌가라는. 그리고 솔직히 이런 걱정도 들더라, 난 할리퀸 매니아라는 사람들의 블로그에서 맞춤법 수준이 높은 글을 본 적이 없는데 이게 오래 전부터 이런 종류의 책에서 배운 틀린 맞춤법 때문이 아닐까라는 쓸데없는 너무 확장된 걱정 말이다.
솔직히 단어 구성 요소 따져가면서 분해해서 한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자기가 읽은 책에서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눈에 익혀서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지 않나?
그래서, 솔직히 말하건데, (아만다 퀵의 전형적인 여자주인공들처럼 잔소리를 한번 하자면) 아직 나이 어린 독자들은 이런 책 안 읽는 게 좋겠다. (아니, 뭐, 재미를 끊을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면 혹은 내 글쓰기는 탄탄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성인도 국어 실력이 망가지는 것보다는 안 보는 게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좀 든다..)
부디, 내가 읽은 것들은 너무 오래된 것들이었고, 요즘 나오는 건 이런 것들에 비할 바가 아닌 좋은 상태로 나오길 바랄 뿐이다.

중고등학교 때 유난히 이런 종류의 책 많이 돌려보던데 요즘도 그럴까? 잘 모르겠으나 고정적인 독자층이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 내가 아는 성인들은 대부분 드라마도 만들어진 한국 로맨스 장르 소설을 많이 읽는 것 같더라. 여튼, 이 분야의 아웃풋이 책으로서의 기대치에 못 미치게 참 실망스럽다. (원서로 봐도 뭐...잘 쓰는 사람과 글 못 쓰는 사람은 확연히 차이 난다. 좀 가려 잘 골라서 번역 출판 좀 했으면 좋겠다. 번역가가 고뇌해서 말 만들어내는 것도 한계에 부딪칠 원작들이 있다.)

(아, 아만다 퀵이라는 이 작가에 대해서도 좀 할 말이 많은데... 뭐, 사실 그닥 글이 수준 높다거나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는 작가라고는 볼 수 없는 것 같다. 특히나 시대물은 대부분 거의 성격 비슷한 캐릭터, 비슷한 상황의 틀에서 찍어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또 탐정 놀이를 가미하려했지만 역시 사건 전개는 이해 안 되게 허술하다. 그럼에도 Ravished 이 작품은 남자 주인공을 화석에 갇힌 동물에 비유해서 설정을 만들어 놓고 화석수집가인 여자를 만나는 상황을 만들고 신경 많이 써서 쓴 표시가 난다. 인물들도 귀엽고 - 아만다 퀵이 자랑스러워하며 등장시키는 여자주인공의 전형인데 상당히 짜증나는 면이 있기도 하다 - 사건도 아기자기 재미있다.)


ps. 창작은 다른 곳에서 합시다.

ps. 차라리 나에게 번역일을 달라.

ps. 베드룸 팟(pot)도 뭔지 모르는 것 같던데.. 그거 '주전자'가 아니라 '요강'이다. (영어도 못해, 시대 배경 지식도 없어..ㅉ)